꿀밤나무 2012. 6. 20. 20:03

 

자매과일집 앞 도로가 제법 깊게 파여 있다. 그 바람에 인도에 자리를 잡았던 과일들이 답답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빼곡 들어찬 과일들이 불만을 표시하듯 머리통을 제각각으로 처박고 있다.

"여기 땅을 왜 파나요?"

"나를 파묻으려나 봐."

출근길에 과일가게 앞을 지나면서 왜 땅을 파는지 물었더니 과일가게 주인은 자기를 파묻으려 한다면 마지막 얼굴이 될지 모르니 잘 보아두란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십 년 전의 일이다.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였다. 과일과 같이 굴러다니는 그녀를 도와 흩어진 과일을 주워 모아준 것이 우리의 첫 인년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몸집이 좋은 그녀는 난전에서 과일을 팔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녀는 여기저기 쫓겨 다니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한번도 세상을 향해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노점상이 더 편했지만 공권력이 어디 개개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인정이 있던가. 환경미화라는 이름으로 경찰들이 한바탕 야단을 쳤다. 그럴 때면사람보다 더 놀란 것이 과일이라며 동글동글한 그것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치료비를 청구해야겠다고 경찰도 웃을 농담을 했다.

가진 것이 단촐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매인 곳 없는 홀가분함일 것이다. 그녀가 가진 것은 작은 트럭과 그것에 실린 과일이 전부였다. 그녀에게 트럭은 보증금 없는 과일상점이었고 전세금 없는 집이었으니 유랑과 정착에 마음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트럭에 실린 붉은색 담요와 냄비와 라면 봉지가 그녀의 가여운 생활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나요?"

"애가 매일 나를 없어 재우지"

길 위에 선 그녀와 상처투성이 트럭 한 대는 같은 운명을 타고 난 것처럼 보였다. 둘은 어딘지 모를 먼 곳에서부터 동행하며 서로를 어루만졌을 것이다. 그녀가 트럭의 침침해진 양쪽 눈을 닦고 있었는데 얼룩진 것은 수건이 아니라 그녀의 때 묻은 소매였다.

나는 가끔 그녀의 눈물을 훔쳐보았다. 그녀가 남몰래 흘린 눈물은 뭇 설움이 가시가 되기 전에 씻어내고 남을 미워하지 않기 위한 씻김굿이었을 것이다.

아파트 밀집지역의 상가 속에서 난전 장사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경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상가주인들이다. 욕설이나 주먹질이 쉽게 오고 가기도 한다. 그런 곳에 그녀는 검버섯 핀 트럭을 세우고 과일을 팔겠다고 어설픈 자리를 잡았다.

날마다 쫓기고 욕을 얻어 먹어가면서도 그녀는 노점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눈썰미가 남다른 그녀는 한번이라도 과일을 사 간 사람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했다가 덤도 아끼지 않고 주었다. 그러다보니 단골이 생기고 그녀를 격려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것이 그녀를 쓰러지지 않게 하는 힘이었다. 욕은 배를 가르고 들어가지 못하지만 격려는 영혼도 파고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많이 힘들지요?"

"나 뱃살이 두껍잖아."

몇 년이 지났다. 트럭 한 대가 전부였던 그녀에게 가게가 생겼고 집도 생겼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집어준 덤처럼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남편과 아이가 한꺼번에 나타났다. 돈이 당당하게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녀는 수년 간 이고 있었던 햇빛을 새로 마련한 가게의 진열대에 내려놓았다. 무게 없는 그것도 오래 이어 있었던 흔적이라고 그녀 정수리는 숭숭 바람이 들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려놓고 나면 홀가분함과 동시에 허전함이 생기나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힘들었 때를 가장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이제 편안하시죠?"

"그때 길에 퍼져 앉아 먹던 라면 맛이 도망갔어야."

상가 한가운데가 그녀 자리다. 계절에 상관없이 달콤한 꽃을 피우는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녀는 한마디씩 건넨다. 그 한 마디에 풋내나는 하루가 익고 수척한 사람들의 마음에 살이 오른다. 따로 따로 굴러다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유머 섞인 말과 과일로 바꾸어주는 것이 그녀의 하루를 마감하는 방법이다.

"왜 아직 구덩이에 안 묻혔어요?"

"배만 보도블록 위로 볼록 나올 것 같아 못 묻는다네."

출근길에 파묻힌다던 그녀가 퇴근길까지 무사한 것은 넉넉한 뱃살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입담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