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정상화를 향해 달리는 김규한 노조위원장
"지역민과 함께 숨 쉬는 쌍용차가 되겠습니다”
지난 1994년 평택쌍용자동차에 입사해 19년 동안 쌍용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린 김규한 노조위원장. 지난 20일 오후 평택시 쌍용자동차공장 노동조합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략 19년일 겁니다. 1994년 입사해서 다음해부터 노조활동을 시작해 대의원, 정치간부, 부위원장, 직무대행을 거쳐 지금의 노조위원장에 위치까지 오게 됐네요.”
지난 2004년 10월 28일 상하이자동차가 약 5900억 원에 쌍용차를 인수할 때에도 그는 옥쇄파업에 참가했다. 약 5000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18일 동안 옥쇄파업을 벌였으며 서울에서 쌍용자동차 인수를 반대하는 ‘3보1배’ 집회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 집무실 한쪽 벽에는 그때 당시를 기억하게 해주는 많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지금생각해보면 참 파란만장한 시절이었죠. 중국의 거대자본과 맞서서 회사를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옥쇄파업을 하면서 서울까지 걸어갔었는데…. 지금은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했었던 행동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최선인가?’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오로지 한 가지 “회사를 살리고 보자”
오랜 기간 노조활동을 경험한 김규한 위원장에게 지난 2009년 정말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2009년 1월 상하이차는 쌍용에 대한 경영권을 포기하고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4월 8일 전체인력 약 37%(2646명)의 구조 조정안이 발표됐다. 소식을 들은 비정규직 근로자 김모씨가 자살하자 5월 22일 쌍용차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투쟁에 들어갔던 노조원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고 희망퇴직자가 자살하는 등 노조의 상처는 점점 깊어졌다. 투쟁 77일 만인 2009년 8월 6일 노사는 쌍용자동차 회생을 위한 노사합의서를 작성하게 된다.
“지금 쌍용자동차가 겨우 한숨을 돌리며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쌍용자동차 회사가 잘해서도 노조집행부의 공도 아닙니다. 동료들을 잃은 슬픔에도 이를 악물고 꿋꿋하게 한마음 한뜻으로 ‘회사를 살리자’는 이념으로 일 해온 조합원들의 노력입니다.”
김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강조했다. 임금동결과 주․야 2교대 근무 등 여러 악조건에서도 조합원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쌍용뿐이 아니겠죠. 보통 예전에는 모든 근로자들이 회사의 매출이 감소해도 상여금이나 월급인상을 요구했었겠죠. 회사가 있어야 노동자도 있고 조합원들도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을 망각했기 때문이죠. 이제는 사측과 노조가 타협을 통해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고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쌍용차에 근무하면 고임금에 좋은 조건으로 근무하는 귀족 노동자, 부르주아 계층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겠다며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내밀었다.
“쌍용차에 근무하면 호의호식하는 줄 아는데 지금 제 월급명세서를 보시면 저희들의 처지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오버타임(근로시간외 근무) 약 50만원 포함해서 세금 제외하고 월급 210만원 받습니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4인 가구 기초생활비용이 약 150만원입니다.”
김 위원장은 현재 근무 중인 쌍용자동차 조합원들이 ‘회사를 살리자’는 일념으로 고통 속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쌍용자동차 공장 라인은 1, 2, 3라인이 있는데 잔업이 많은 3라인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거나 더 낮은 봉급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에 임금 동결했고요. 2011년에 7만 8천원, 올해는 약 8만원 정도 기본금이 인상됐죠. 3년 동안 15만원 올랐네요. 바깥에서는 이런 세부적인 내용을 모르실겁니다. 이런 것들을 보지 않으니 쌍용자동차가 무급휴직자들을 외면한다고만 생각하지요.”
김 위원장은 쌍용사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점도 안타까워했다. 2년 전만 해도 그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다. 자신과 다른 점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는 진보성향의 운동에 실망한 나머지 당을 탈퇴한 후 지금은 정당 활동을 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점을 이용하는 모습이 그에게 좋지 않게 보였다. 현재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은 민주노총 금속노조에서도 탈퇴했다. 회사를 회생하기 위해 사측과 협력해서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보여 졌다.
“조합원들을 위해 회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저희도 사람이니깐요. 하지만 일단은 회사를 살리려고 많은 점을 타협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쌍용자동차에서 정리 해고되어 목숨을 잃은 22명의 동료들을 살리고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라고 합니다. 그 중에는 15년 동안 회사에서 동고동락했던 친구도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한 사람들은 저희들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 쌍용차는 악덕이고 그 안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한통속이라고 매도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은 해고자들을 복직을 위해 무엇을 해줬는지 궁금합니다. 조합에서는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서 매달 50만원씩 유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격한 감정을 다스리며 말을 이어가던 김 위원장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고 있었다. 해고된 동료들을 위해 힘든 싸움을 했던 그의 노력이 묻어나는 듯했다. 동료들을 복직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여러 세력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조합원들을 단결시켜 ‘쌍용차 회생’이라는 목표를 향해 그는 달리고 있었다.
“2012년 총선과 대선 등 여러 가지 선거를 앞두고 ‘쌍용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22명의 동료들의 가정사를 자세히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해고자들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자들이 안타깝습니다.”
회생과 함께 시작한 평택사회로 ‘환원활동’
수많은 동료들을 떠나보내며 그들은 많은 교훈을 얻었다. ‘회사가 잘돼야 노동조합이 잘되고 노사가 협력해야 회사가 발전한다’는 가르침이다.
2009년 8월 노사합의가 이뤄지면서 쌍용자동차는 커다란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회생과정을 진행했다. 그와 더불어 시작한 것은 평택사회에 소외계층들을 위한 사회환원활동이다.
2009년 12월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각 출입문에 자선냄비를 설치를 시작으로 아파트 노인정에 TV 및 쌀과 생필품 증정, 저소득층 가정에 생필품 지원, 관내 초․중등학교에 도서기증 등을 비롯해 저소득층 학생들의 장학금을 지원하기 위해 매달 200만원씩을 평택시에 전달하고 있다.
“솔직히 쌍용차가 잘 나갈 때에는 잉여금을 평택사회에 많이 기부하지 못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쌍용이 무너질 때 평택시민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법적관리에 들어가면서 탄원서에 서명을 해주신 점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훗날 쌍용이 평택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을 맞았을 때 평택시민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평택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김 위원장을 비롯한 조합원들과 쌍용차의 생각이다.
이제 쌍용은 회생을 위한 발판을 다졌다. 지역사회로의 환원도 열심이다. 다만 남은 문제는 무급휴직자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
쌍용은 지난 2010년 약 8만대, 2011년 약 11만대를 판매했지만 아직까지 해고자들을 복직시킬 수준은 아니다.
쌍용을 살리기 위해서는 판매량을 늘리는 한편 부품 인프라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생각이다.
“쌍용은 약점은 부품인프라구축이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저희들이 현재 생각하는 것은 부품인프라공장을 설치해서 완성차를 만드는 현대․기아차와 마찬가지로 생산비용 절감이라던지 고용창출 부분이라던지 여러 문제가 해결된다고 봅니다. 현대자동차가 수출이 잘되는데 현대는 차체를 직접 만들 수 있습니다. 덕분에 토털 브랜드가치가 올라가고 가격경쟁력, 고객만족도 등 모든 면에서 유리하게 됐죠.”
더불어 해고된 동료들을 위하고 쌍용을 살리고 싶다면 정치적으로 탄압하지 말고 정부에서 어느 정도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판매량이 늘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라는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쌍용을 돕겠다면 인프라구축을 할 수 있게 도와주던지 한시적으로라도 쌍용차의 판매를 보장하는 법안을 만들어주던지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총선과 대선이 맞물린 2012년 쌍용차에도 선거가 있다. 현재 노조집행부가 올 12월 임기를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향후 집행부에서도 열심히 쌍용차 정상화를 위해 애써주길 바란다”며 조합원들의 대변인이라는 노조집행부의 역할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