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치고 장구 치고
J학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와는 예전에 함께 근무를 한 적이 있는 절친한 사이다. 큰 학원을 차린 그가 좋은 조건으로 같이 근무하자고 여러 번 제안을 해왔다. 그날도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식사가 끝나고 원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식당아주머니가 들어왔다. 그녀는 알약 하나를 슬며시 원장의 자리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뭐냐고 묻자 비아그라고 하며 웃음을 흘리고 나갔다.
요즘은 식당에서 별걸 다 준다 싶었다. 아마도 주인은 원장과 나를 연인쯤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원장이 들어왔고 알약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뭐냐고 물었다. 비아그라라는 내 말을 듣고 알약을 집어 들더니 ‘요렇게 생겼구나’ 했다. 사실 나도 비아그라를 본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왠지 퇴폐적인 여자 같이 볼까봐 애써 못 본 척했다.
남녀들이 쌍쌍으로 오는 식당일수록 주인의 감각이 뛰어나다며 원장은 몇 번 경험한 일처럼 말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친 나는 요즘 밥장사도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식당은 음식만 맛있게 하면 되고, 학원은 학생만 잘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은 이미 구닥다린 모양이다.
원장은 알약에 미련이 많아 보이는 듯했다. 속으로 ‘구하기도 어려운 약인데 집에 갖고 가시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 왔지만 혀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평소 농담도 잘하고 친하게 지냈던 터라 어지간한 말은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원장은 알약을 상에 얹고 손끝으로 돌돌 굴렸다. 혈기가 한풀 꺾인 원장 나이엔 탐이 날 만한 약일지 모른다. 다만 내가 앞에 있으니 속내를 들키는 것 같아 망설임만 알약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앞에 앉은 원장이 먹이를 보고 달려가는 충혈 된 눈을 가진 거미 같이 보였다. 꽁지에서 뿜는 탐욕의 실이 먹이를 사정없이 감을 때 혀의 돌기들이 하나 둘 발기를 하자 거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된 모양이다. 원장은 눈 깜짝 할 사이 알약을 삼키고 말았다.
순간 아찔한 생각이 뇌를 쳤다. 내가 아는 싸구려 상식에 의하면 사태가 심각해질 것이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유머부터 경험담까지 일순간에 머리를 휙 지나갔다. 무척 당황하는 나를 보는 원장의 눈이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콩닥거리기 시작했고, 온 피가 심장에서 머리로 다 몰려드는 것 같았다. 복용 후 나타나는 이상 증상에 대해 다 책임져야 하는 약사가 된 듯 마음이 불안했다. 얼마 후가 되면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약은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지나야 최대 약발이 나오지 않던가. 이 시간이 흐르기 전에 빨리 각자 집으로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여기서 그걸 먹으면 어떡하느냐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학원에서 일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하라고 했다. 왠지 협박 같이 들렸다. 원장의 몸 속 피가 차츰 한 방향을 향해 모여들 거라는 생각을 하자 얼른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원장의 제안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빨리 집으로 가자고 재촉하며 일어섰다.
내 마음이 얼마나 바빴던지 조수석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액셀러레이터를 발끝으로 수도 없이 밟아댔다. 그날따라 차는 왜 그리 막히는지 평소에 지나갔음직한 노란불도 착실히 다 지키는 원장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기만 했다. 비상불도 들어오지 않은 차에 주유까지 하고 세차까지 부탁했다. 생각은 자꾸 꼬리를 물었고 이미 나는 거미줄에 감겨있는 먹이가 되어 가슴이 죄어 오고 머리가 무겁기 시작했다. 그의 아랫도리가 뻣뻣해져 온다면 나는 머리가 뻣뻣해져 갔다.
도로가엔 무슨 모텔 간판이 그리도 많은지 며칠 전에 한꺼번에 다 달았는지 예전엔 보이지도 않더니만 쏙쏙 들어왔다. 만일의 사태를 어찌해야 할 건지도 생각해 뒀다. 생각지도 않은 알약의 출현으로 생긴 일이니까 두 사람이 다 민망하지 않게 잘 해결해야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원망도 가득했다. 야한 농담도 스스럼없이 하던 원장이 식당 아줌마에게 일부러 부탁해 받은 알약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신호등 앞에 차가 멈추었을 때 옆 눈으로 슬그머니 원장을 봤다. 얼굴빛이 붉다. ‘괜찮으세요’ 했더니 ‘뭐가요?’ 한다. 이런 뻔뻔한 인간이 있나 싶었다. “아까 먹은 약요.” 하자 목젖까지 드러내고 웃었다. 그날따라 웃음소리는 특별히 더 컸고 나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거요, 몰랐어요? 비타민인데.......”
열이 펄펄 올랐던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잘 속고 어리숭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밥이란다. 색깔만 봐도 비타민인데 영어로 C자까지 새겨졌기에 아까 본 줄 알았다며 그래서 먹었다고 한다. 잠시 동안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부끄럽기만 했다. 식당주인의 속임수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나는 한 번씩 쓸데없는 흥분을 잘 한다. 나중에 알고 보면 별일 아닌데 나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여 속을 끓이고 애달아 죽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어렵거나 난처한 일일수록 신중하게 생각하고 여유를 부려보자 마음먹지만 쉽게 끓어오르는 성격 때문에 늘 실수를 한다. 쓸데없는 일에도 흥분이 잘 되는 건 젊다는 증거겠지만 사람이 어디 젊음만으로 세상을 잘 살아지던가.
젊은 혈기를 이기는 것은 지혜로운 생각과 느긋한 행동이라는 것을 짧은 순간의 착각을 통해 알았다. 손이 빠르고 힘이 좋다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면 우리 가락이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지는 구경거리가 되고 마는 것을. (20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