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담 주인석

꿀밤나무 2012. 4. 24. 15:22

끼인 것은 애처롭다. 틈새에 박혀 꼼짝도 못한 채 온몸으로 아픔을 안아야하며 무리 가운데 섞여 표시도 안 나는 것이 끼인 것의 운명이다. 끼인 것 중에 대우 받는 것은 거의 없다. 생물에서 무생물까지 끼인 것은 눈치 보며 살아야 하는 초개같은 존재다.

뭔가 단단히 끼였나보다. 서랍이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서랍도 상자라 마구잡이로 물건을 쑤셔 넣기만 했더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랍과 나는 손잡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미간을 치켜 올리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던 줄다리기였는데, 서랍이 약간의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들여다보니 어지럽혀진 물건들이 서랍의 갈비뼈처럼 진을 치고 있고, 삼각자 꼭지가 서랍의 윗부분에 팔씨름하듯 걸려 있다. 조금 강하게 잡아당기니 약간 휘어지는 듯 했다. 계속 당기면 부러질 것 같았다. 손가락을 넣어 봐도 걸린 부분까지는 닿지 않는다.

확 잡아당겨서 부셔 버리고 싶었지만, 모든 일을 차근차근 하라고 가르친 체면에, 아이들 앞에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벌어진 틈으로 손가락에 잡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약간의 공간이 생길 때마다 서랍을 밀고 당기며 흔들어주었다. 빈공간 사이로 삼각자가 자리를 잡아 주길 바랐다.

한참 실랑이 끝에 서랍을 여니, 삼각자가 휘어진 허리를 보이며 누워 있다. 서랍 속에 끼여서 성질부리며 꼼짝 않던 삼각자가 자리를 만들어주니 누그러진 것이다. 끼인 것들은 통증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기다린다. 삼각자의 휜 허리를 주물러 펴는데 그동안의 통증이 내 손 끝에서 마음을 타고 흘러들었다.

여느 사람들도 한 번 쯤은 끼인 고통을 경험 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십대가 끼인 신세의 절정이 아닐까 싶다.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에 끼여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비켜갈 수는 없었다. 남편과 아이, 시댁과 친정, 부모와 자식,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나이가 들수록 아이가 되어가는 남편과 철없는 아이 사이에서 날마다 가탈을 부렸다가도 도인이 되기를 자처한다. 부어도 끝이 없는 시댁과 얻어 오기만 하는 친정 사이에서 부모의 괴리를 느끼며 부모 되기가 겁나는 끼인 며느리고 딸이다. 어버이께 효를 다하라고 배워 왔고 가르치고 있지만, 올리는 사랑보다는 내리는 사랑이 더 많다. 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소리를 듣는 세대를 넘어 점점 말하는 처지로 변해가고 있다. 앞으론 이 말조차도 하기 미안해지는 날이 오지 싶어 마음이 씁쓸해진다.

이 시대의 중년들은 부모의 은혜를 눈감지도 못하고 자식의 뒷바라지를 거두지도 못하는 마음 착하면서도 어리석게 끼인 운명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 세대를 두고 부모부양의 마지막 세대, 자식에게 버림받을 1세대라는 웃지 못 할 유행어까지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끼인 것이 꼭 중년들의 아픔만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땐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부부싸움만 하면 왔다갔다 말 심부름하는 로봇 노릇을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다 들리는 말을 굳이 전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다툼에 끼인 나는 아무 잘못도 없었지만 양쪽으로 구박을 받으며 말을 전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부모님 사이에 끼인 고통보다 더 한 것이 있었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에 끼인 신세가 되어 눈치놀음만 늘었다. 특히 오빠의 심술은 어디 견줄 곳이 없었다. 끼인 것들이 받는 자극은 가장 가까운 것일수록 심하다. 그때 받은 끼인 자국들은 아직도 내 가슴에 선명한 무늬가 되어 아픔의 흔적을 안고 있지만 나 또한 살면서 헐겁게 하기보다 여전히 죄는 일에 더 익숙해져 있다.

열 손가락 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냐는 말이 있지만, 조금 덜 아픈 손가락은 있다. 엄지손가락은 새끼손가락보다 굵어서 덜 아프다. 작고 어린 것은 늘 마음이 더 간다. 부모님도 육남매를 키우면서 잘라 놓은 두부같이 골고루 똑같은 사랑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식들은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아도 부족하다 느끼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 앞에 질투심으로 멍들었던 손등의 자국이 늘 나를 깨우치지만 어미가 되어 아이를 키워 보니 역시 어린 것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두 녀석 사이에 낀 어미 노릇이 쉽지 않음을 자식 키우면서 알았다.

어릴 적 나와 같은 처지가 된 작은 녀석은 애교가 구단이다. 눈치로 갈고 닦은 단증이다. 끼여서 자란 녀석은 약간 까칠한 구석이 있지만 언제나 살갑고 인정스럽다. 그런 까닭인지 사람이 많이 따른다. ‘끼인’을 거꾸로 읽어보면 ‘인끼’가 된다. 이것은 고뇌와 고통을 연단으로 닦아 얻은 결과다. 이에 비해 큰 아이는 요령과 지혜를 만들어가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느낌대로 행동하고, 우직하게 움직이다 보니 작은 녀석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다.

어느 곳에나 끼여 있는 것들은 말 못하고 상처를 받을 때가 많다. 서랍 속에 끼여 온몸이 구부정해진 삼각자를 보면서 어쩌면 이 시대에도 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 말 못하는 아픔으로 마음이 굽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가족이든 남이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여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나와 남을 위해 가끔씩 흔들어 주는 여유를 가져봄도 좋을 것이다.

나는 늘 끼여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반대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서랍속의 삼각자를 보면서였다. 서랍의 품은 생각지도 않은 채 물건을 넣기만 했으니 말이다.

정리한 서랍을 앞뒤로 흔들어 준다. 사람 사이도 이러해야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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