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해 호주 시드니에서,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살아온 신호범 박사(워싱톤주 상원의원 부의장)와 며칠을 함께 보내면서 참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분은 네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일을 찾아간다며 집을 나간 뒤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여섯 살 때부터 서울역과 남대문 시장통을 떠다니는 거지로 하루하루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아홉 살 되던 추운 겨울 어느 날 그냥 친구들을 따라 무작정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 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창문 너머로 칠판을 쳐다보며 헌 종이에 필기를 하다 지나가던 순경에게 들켰습니다.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마구 도망치던 그를 붙잡은 순경은 뺨부터 한 대 갈긴 다음 “뭘 훔쳤냐”고 꾸짖습니다. 이 어린 소년은 울면서 종이를 보여주자 그제야 전후 사정을 깨달은 순경은 식당에 데려가 국수를 사주며 어려워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합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지은 자작시가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별을 세었고
엄마가 보고 싶어 별을 세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 별을 세었고
외로워서 별을 세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별을 세었고
내가 너무 작아 별을 세었습니다.
별을 세다 보면
꿈을 꾸듯 희망이 생기고,
내 자신을 망각한 채
별 속에 서서 별만 셉니다.”-「별을 세다 별이 되어」에서
엄마가 보고 싶어 별을 세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 별을 세었고
외로워서 별을 세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별을 세었고
내가 너무 작아 별을 세었습니다.
별을 세다 보면
꿈을 꾸듯 희망이 생기고,
내 자신을 망각한 채
별 속에 서서 별만 셉니다.”-「별을 세다 별이 되어」에서
그러다 한국전쟁 당시 지나가던 미군 트럭에서 미군들이 초크릿과 껌을 던져주자 그것을 받아먹으며 용기를 내어 차에 매달렸다 미군에게 픽업돼 미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됐습니다. 처음엔 장교 7명의 군화를 닦고, 방 청소하는 일을 했습니다. “구드 모닝가 싸(Good morning, sir)”란 되지도 않는 영어 발음을 씩씩하게 외쳐대며 총알처럼 빠르고 부지런하게 일하던 그는 ‘벅 샷(Buckshot·사슴사냥용 총탄)’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가 제일 믿고 따르던 군의관 레이 폴 대위가 18세인 그를 양아들로 입양하여, 미국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그는, 19살 때까지 글자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미국이 기회의 나라라고 해도 이런 그에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때문에 초등학교는 가지 못하고, 여러 하이스쿨 문을 두드렸지만, 가는 곳마다 거절당했습니다. 너무 많은 거절 속에 절망한 그는 어느 교장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었답니다. 그가 펑펑 우는 것을 바라본 교장이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안되는 영어로 더듬거렸습니다. “너무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그것을 거부당해 서러워 웁니다. 내 꿈이 조롱당하는 것같습니다. 미국에 오면 나도 공부하는 길이 열리는구나.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구나하고 무지개꿈을 꾸었는데 그게 무너져 버리는 것같습니다”
한참 고개를 떨구고 듣던 교장 선생님이, 검정고시를 안내해주며, 그 자리에서 영어선생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영어 한문장 쓰지 못하던 하우스보이 출신의 19살 청년은 양부모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면서 공부했습니다.
마침내 워싱턴대학에서 역사학박사를 받고, 하와이대, 메릴랜드대학에서 31년간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워싱톤 주의원(국회의원)에 도전하여 지금 4선의원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란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답니다.
그리고 한국에 살던 동생 5명과, 뒤늦게 행방을 찾은 친아버지까지 모두 미국으로 모셔와, 무너져 내리던 한국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가난만 주고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지만, 이젠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계셨습니다.
“친아버지는 제게 한국피를 주셨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가난도 주셨지만, 그걸 이겨 낼 능력과 노력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정말 고맙습니다.”
그분은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을 대물림하기 위해 동양계 혼혈 2명을 아들과 딸로 각각 입양해 훌륭히 키워냈습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들려주신 말 한마디가 참 진하였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피보다 더 진합니다.”
고향 친척을 떠나온 교회 안에서 골육의 육친보다 더 진한 사랑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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