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면 종 모양이다. 사람의 삶은 크게 육체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관찰해 보면 처음엔 서서히 올라가다가 어느 정점을 기준으로 평편해졌다가 다시 서서히 하강하는 곡선 그래프다. 우리의 삶이 정점에 도달 했을 때는 종의 추처럼 여기저기 부딪힐 일도 많다. 이렇게 종과 닮은 인생 그래프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육체적 종 그래프라 하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종 그래프라 이름을 붙였다.
사람의 육체적 삶을 종의 모양에 비유하게 된 것은 아흔이 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다. 최근 아버지는 한 살배기 아기가 되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고 계신다. 미음이나 과즙을 먹는 시간 외엔 잠으로 하루를 보낸다. 조금 배가 부르다싶으면 혀로 미음을 밀어낸다. 신생아와 똑같은 모습이다.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이에게 돌아가려는 준비를 온전히 하고 계신다. 세상에 올 때 꼭, 그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사람은 신생아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이르는 오르막 그래프를 그린다. 장년기를 정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다시 청소년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노년기를 보내고 아기처럼 천진난만해지는 말년을 보내며 하늘나라로 가는 내리막 그래프를 그린다. 이것은 인생의 절정을 지나 다시 되돌아오는 출장 같은 것이다.
정신적 그래프도 이와 같다.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종의 모양에 비유하게 된 것은 남편이 출장을 가고 난 뒤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부쩍 아들에게 기댄다. 되돌아보면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기대며 정신적 지주로 삼다가 결혼 후에는 남편을, 아들이 성장하니 그 자리에 아들을 앉혀 놓고 기댄다.
며칠 전 남편이 출장을 갔다. 아들은 문득 옛날이 생각났는지 이런 말을 한다.
“엄마, 물 안 떠놔?"
“그 짓을 또 해? 네가 있는데.”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툭 튀어 나왔다. 그 짓, 돌이켜보면 정말 짓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나는 웃기는 행동을 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그랬다.
남편이 출장을 가고 나면 물을 담을 수 있는 대야 종류는 모두 꺼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곳에 물을 받았다. 그 물 그릇들을 하나씩 현관문 앞으로 날랐다. 아이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신이 나서 뛰어갔다 뛰어왔다 나를 따라 설레발을 쳤다. 물이 담긴 용기들을 일렬로 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지그재그로 쌓았다. 물그릇을 아슬아슬하게 쌓을 때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함성을 질렀다.
현관문 앞에는 위태위태한 물 탑이 하나 만들어졌다. 다음은 중문 앞이다. 중문 앞에도 물그릇을 어지럽게 놓았다. 그 다음 베란다, 그곳은 면적이 넓기 때문에 아이들 목욕통까지 동원을 했다. 그야말로 그릇이라는 그릇은 모두 물을 담아 내 놓았다.
비장한 내 마음과는 달리 철이 없는 아이들은 그곳에 붕어를 기르면 좋겠다는 둥, 목욕을 하면 안 되냐는 둥, 물감을 풀어 놀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따라 물 탑 쌓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물감과 종이를 가져 오라고 했다. 하얀 종이로 배를 접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빨간 물감, 노란 물감, 파란 물감을 풀고 종이배를 띄워 입으로 불었다.
아이들이 종이배를 가지고 노는 동안 나는 나머지 창문 밑에 물을 가져다 놓았다. 완벽하게 물 탑을 다 쌓은 다음 전화기 코드를 뽑아 모두 안방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아이들을 안방으로 몰아넣고 긴급훈련을 시켰다.
“오늘 밤, 도둑이 우리 집에 들어올지도 몰라. 만일 도둑이 현관문을 따고 들어오다가 물그릇에 걸려 넘어져 허우적거리면 말이야, 그때를 잘 이용해야 해. 그때 엄마는 안방 문고리를 꼭 잡고 있을 테니 너희들은 얼른 112에 신고를 해야 해. 알겠지?”
내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는지 조용해졌다. 내가 물그릇을 문마다 놓아둔 것은 만일에 들어올지도 모를 도둑이 넘어져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시간을 벌어 신고를 하고 위기를 모면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도둑이 들어온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다 물그릇에 걸려 넘어지는 해프닝만 있었다.
그 일은 남편의 출장 때마다 계속 되다가 아들이 중학교에 가면서 그만 두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들이 내 키보다 커지면서 믿음이 갔다. 밖에서 작은 소리가 나도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런 아들이 남편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일이 영화 ‘나 홀로 집에’ 같아서 웃음이 난다. 그때는 남편 없는 집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아들은 그 일을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하고는 남편이 출장 갈 때마다 ‘물 안 떠 놔?’하며 나를 놀린다. 그때마다 나는 ‘네가 있잖아’라는 말로 아들의 마음에 족쇄를 채운다.
자식이 품을 떠나고 나면 다시 배우자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출장 간 사람이 돌아 온 것처럼. 대부분 사람들의 정신적 그래프를 보면 이와 유사하다. 처음엔 부모를 믿고 의지하다가 결혼을 하면 배우자를, 자식이 크면 자식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상향그래프를 그리게 된다. 그러다가 자식이 떠나가고 나면 다시 배우자를 믿고 의지하며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을 찾아가고 마음을 나누는 하향 그래프를 그린다.
이런 과정을 살펴 그려보면 삶의 그래프는 종 모양이다. 종모양의 그래프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다. 그러나 곡선의 안에 있는 종의 추는 사람마다 다르게 울린다. 급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는 사람도 있고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은은한 소리를 내며 사는 사람도 있다. 시끄럽든 은은하든 부딪혀서 소리가 나는 종이 아름답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