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담 주인석

귀신고래

꿀밤나무 2012. 6. 21. 09:55

 

울산 앞바다에 움직이는 바위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 풍문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돌았다. 박인량이라는 사람이 어찌나 실감나게 소문을 퍼뜨렸던지 사실 여부를 확인 할 틈도 없이 책에까지 실려 전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울산 앞바다의 바위에 앉을 때는 먼저 바위를 꼬집어보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지금부터 천여 년 전 울산 앞바다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남녀가 살았다. 그들은 바위에 앉은 채 차례로 사라진 후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연오랑은 세오녀에게 바칠 미역을 따러 나갔다가 변을 당했고 세오녀는 돌아오지 않는 연오랑을 기다리며 바위에 서서 슬피 울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니 유력한 용의자로 바위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그 바위의 출몰에 대한 특별한 제보는 없지만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며 남녀의 실종에 대해 최초로 박인량이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지만 그 또한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니 사건은 미궁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풍문을 흘리기 시작했다. 때 묻지 않은 그 창의성이 수사에 일조를 할 것이고 그 아이들이 크면 계속 소문을 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옛날에'하며 시작된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내가 십여 년간 퍼뜨린 이야기는 족히 수백 명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귀가 번쩍 열리는 소리는 없다. 그 아이들도 지금쯤 바위에 걸터앉아 데이트를 할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변을 당할지 모르니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여 바위를 꼬집고 흔들어 확인하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종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고 있었는데 체험학습을 다녀온 아들의 한마디가 다시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바위를 봤다는 것이다. 그 바위를 움직이지 못하게 가두어 놨더란다. 그렇지만 또 다른 바위가 바다에서 예고없이 불쑥 나타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인다.

아들 말을 따라 가다보니 바위는 도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언제 빠져 나갈지 모르는 바위의 발목을 묶어둔 항구 앞에 바위를 가두어 둔 건물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고래 박물관'이다. 그곳에 갇혀 있는 바위와 천 년 전의 남녀를 생각해 보았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생이별시켰다가 이내 둘을 어디론가 감춰버린 바위가 아닌가. 그곳이 복숭아꽃 만발한 무릉도원인지 별이 와글거리는 별천지인지 추궁하기보다는 나도 그 바위를 타고 깊은 곳으로 가서 누구나를 기다릴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사가 앞선다.

박물관 1층을 한 바퀴 돌고 2층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데 얄궃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드디어라는 말은 이럴 때 적절하다. 나보다 먼저 소문을 듣고 달려온 누군가가 바위를 잡고 심문을 시작했나보다. 흥분된 피들이 심장을 마구 때렸다.

실내로 들어서니 50인치 화면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화면 속에는 한 마리 고래가 유유히 헤엄을 치며 파란 바다를 두 쪽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물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하늘을 향해 화살표처럼 속아 올라 그 자리에 떡하니 멈추었다. 그 순간 아, 소리가 온몸에 진동을 일으켰다.

바위였다. 고래가 하늘을 향하여 입을 다문 채 멈추는 그 순간 바위가 되었다. 어쩌면 고래는 바다의 품에 안겨 살면서 평생 하늘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그 사랑이 변함없음을 보이기라도 하듯 하늘을 향해 하루에도 몇 번씩 바위가 되어 서 있는 것이다.

그때 뒤통수가 당겼다.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고래가 박제 되어 있었다. 아니 바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았다. 하늘은 눈을 감지 못한 고래의 절절한 사랑을 열려진 창으로 엿보고 있었다. 온몸을 펄 속에 던져 비상(飛上)의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했던 고래였다. 그때마다 고래를 위로하는 것은 따개비였다.

따개비가 고래의 몸에 붙자 고래는 바위처럼 보였다. 하늘을 향해 멈추어 선 고래는 망부석이 되었다. 고래를 바위로 착각한 사람들이 고래 등에 앉았고 고래는 서슴없이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 감쪽같이 숨겨 버렸다. 그때부터 귀신고래라는 이름이 붙었다. 푸른 바다위에 하늘을 향해 꼼짝 않고 서 있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고래가 귀신처럼 사라질 때는 애절하고 진실한 사랑을 발견했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고래는 사랑의 주인공들을 소리 소문 없이 낙원으로 실어다 날랐던 것이다.

천 년의 세월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움직이는 바위의 정체가 드러났다. 하지만 사라진 연오랑과 세오녀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박제된 귀신고래와 그 종족들만 아는 일이다.

넒은 바다 어디엔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래만 아는 낙원이랄까. 가슴에 사무치는 사랑으로 고민을 하거나 온몸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랑을하고 있다면 연인과 함께 장생포의 바위를 한번쯤 찾아가 볼 것을 권한다. 그곳에 앉아 딴 세상을 꿈꾸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바위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서운해 할 일은 아니다.

귀신처럼 사라질지도 모를 그 바위는 분명 장생포의 바위들 가운데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특별히 따개비가 많이 붙어 있는 바위를 발견했다면 행운이 온 것이다. 그 바위에 앉았는데 움직임이 느껴진다면 대양과 파라다이스를 꿈꾸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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