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담 주인석

덧거리

꿀밤나무 2012. 4. 24. 19:31

천방지축으로 살아도 행복한 날이 있다. 인생사 절반을 대차대조표 없이 이러쿵저러쿵 살다보니 손익계산서야 보나 안 보나 뻔하다. 아직까지 계획성 있는 가계를 꾸려본 적이 없다. 쓰다가 남으면 저축이고 없으면 굶는다. 그러다보니 통장은 몇 개월에 한 번 씩 보게 되는데 어떤 때는 횡재한 느낌이다.

내 천방지축 살림살이에 또 다른 하나는 시장 보기다. 꼼꼼하게 살 것을 기록하여 나서는 여느 주부와는 다르게 나는 장바구니도 없이 나설 때가 많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은 까만 비닐봉지가 내 손가락의 숨통을 몇 겹으로 죈다. 그럼에도 나는 시장 볼 때마다 행복하다.

목요일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재래장이 선다. 퇴근길에는 무작정 장을 보는데 집에 있는 냉장고 속은 안중에도 없다. 우선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산다. 이러한 충동구매를 하다보면 배보다 배꼽이 커질 때가 있다.

딸과 함께 이런 저런 것들을 사서 코너를 돌아 나오는데 할머니가 소쿠리 네 개를 앞에 두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시골에서 가져왔음직한 푸성귀를 보면 필요하지 않아도 꼭 산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오면서 생긴 일종의 향수병이다. 할머니를 보자 잠자던 그것이 발병했다.

할머니는 두릅을 팔고 있었다. 네 소쿠리에 담긴 것이 모양도 값도 모두 다 달랐다. 두 소쿠리는 시들시들한 두릅이 담겨졌고 값은 오천 원, 삼천 원이었다. 나머지 두 소쿠리는 싱싱한 두릅이었고 이것 역시 오천 원, 삼천 원이었다. 시들시들한 것은 자연산이고 싱싱한 것은 양식이란다.

산에서 따왔다는 소리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보아도 나무줄기 잘라 놓은 것 같은데다 말라서 영 상품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의 소쿠리에 어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싱싱하게 보이려고 두릅을 몇 번씩 뒤집어 놓는데 내 눈에는 두릅이 손 같았고 손이 두릅 같았다.

내 뇌의 회로가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네 바구니를 다 사고 싶었다. 옆에서 내 생각을 화들짝 깨게 한 야무진 딸 때문에 결국 생각을 절반으로 줄였다. 딸은 얼마 전 일을 벌써 잊어버렸냐는 듯 눈을 흘긴다.

일전에 감자를 엄버지기로 산 적이 있다. 넥타이를 맨 아저씨가 승용차에 감자를 싣고 와서 팔고 있었다. 시골 부모님이 지은 농산데 못 팔아서 아들인 자신이 팔러왔다고 애절한 사연을 말했다. 그래서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샀다. 감자는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 많았다. 썩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감자 반찬을 좀 골고루 했다. 감자 국, 감자볶음, 감자조림, 감자튀김, 감자샐러드까지 해서 며칠간 올렸다. 계속해서 감자 반찬을 먹던 딸은 뱃속에서 감자 싹이 트고 있다는 둥 화장실에 가면 밑으로 감자가 나오겠다는 둥 잔소리가 많았다. 그래도 줄기차게 감자 반찬만 올렸던 적이 있었다. 딸은 그때 기억을 해 내는 듯 한소쿠리만 사라고 눈짓을 한다.

사실 한 바구니만 해도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양이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이미 두 바구니를 향해 있었다. 내가 싱싱한 두릅만 사버리면 시들시들한 두릅은 영 팔릴 것 같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반반씩 사야했다. 시들시들한 것 중에 내가 큰 것을 사 버리면 작은 것 파는 일은 좀 쉬울 것 같았다.

“할머니, 밭에서 키운 것 삼천 원짜리와 자연산 오천 원짜리 주세요.”

“참말로? 식구가 많은가 보네?”

“아니요. 제가 두릅을 아주 좋아해요.”

“아이구 참말로 고맙구먼.”

내 말에 반가워 죽겠다는 할머니를 보면서 딸의 얼굴을 슬쩍 봤더니 ‘에구, 저 아양 또 나왔네. 두릅을 아주 좋아해?’ 하는 얼굴이다. 할머니는 까만 비닐봉지를 세 개를 꺼냈다. 내가 주문한 두 가지를 담고 다시 시들시들한 삼천 원짜리를 다른 봉지에 담는 것이었다.

“봐라, 새댁. 요것은 내가 그냥 줄 테니 가져가서 먹어.”

팔천 원을 내고 만 천원어치를 얻었으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냐고 흥분해 있는 나와는 달리 딸의 눈은 ‘엄마 언제 철들래?’하는 눈이다. 일주일 내내 두릅 반찬 안 할 테니 걱정 말라는 내 말에 딸의 입이 샐쭉한다.

계획성 없이 살아가지만 인생의 대차대조표 차변에 마음을 조금만 보태면 대변에 갚아야 할 빚들은 굳이 신을 찾지 않아도 소멸되어 행복해지는 것이다.

'수필 > 이담 주인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이기  (0) 2012.04.24
라이브콘서트  (0) 2012.04.24
대체의학  (0) 2012.04.24
북 치고 장구 치고  (0) 2012.04.24
비빔밥  (0) 2012.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