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에 고래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다. 바다의 수많은 생물 중에 무엇으로 보나 고래가 으뜸이다. 국경도 뭉개고 다닐만한 권세와 입만 열면 약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한꺼번에 끌어 담을 수 있는 식욕과 무서울 것 없는 덩치까지 가졌으니 과연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런 고래에게도 고충은 있다. 고독이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푸른 바다위에 혼자 철벅거리는 고래를 보면 혈혈단신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너무 잘난 까닭으로 늘 외롭다는 것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히 고래박물관 영상 화면에서 발버둥치는 귀신 고래를 보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윤이 나면서 매끈해야 할 피부가 보기 흉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대양의 왕이었던 고래를 누가 이다지도 형편없게 만들었을까. 자세히 보니 그 원흉은 작고 보잘것없는 따개비였다.
따개비가 떨어져 얼룩얼룩한 자국에다 현재까지 붙어 있는 따개비로 인해 고래의 몸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펄 속에 몸을 굴리지만 않았어도 따개비가 붙지 않았을 것이고, 매끈한 고래로 멋진 삶을 유지했을 것을. 사람이든 생물이든 몸은 잘 다스리고 볼 일이다.
어떤 곳에든 야무지게 달라붙는 따개비를 볼 때마다 나는 참 징그럽고 싫다는 생각을 했다.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도 싫지만 물이 찼을 때와 빠졌을 때의 약한 모습과 민망한 모습의 이중성이 싫다. 물속에 잠긴 따개비는 가녀린 여섯 개의 다리를 하늘거리면서 감쪽같이 먹이사냥을 한다. 그러다 물이 빠지면 이내 네 개의 판으로 몸을 덮어버리는데 그 모양이 꼭 여자의 치부와 닮았다. 그러면서 물이 차오르면 다시 열지 않을 것 같던 판을 쉽게 열어버리는 따개비의 모습이 마치 권력이나 돈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리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따개비가 붙은 고래를 보면서 내 몸이 얼마나 근질근질했는지 모른다. 그것들을 박박 긁어 내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화면 속의 고래가 아니었다면 나는 연장을 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수 년 전에도 이와 같이 긁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은 적이 있다. 가까이 지내온 이웃의 언니를 보면서 내 몸이 더 근질거려 그런 쑤석거림이 일었었다.
언니는 변함없이 꿋꿋한 사람이다. 언니를 두고 어떤 이는 천사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멍텅구리라고 말한다. 나는 성격이 곱지 못해 그런지 언니를 후자라고 본다. 내 눈에는 언니가 하는 행동이 신의 경지에 도달했거나 여자이길 포기해야 할 수 있는 일로 보였다. 보는 사람이 더 속이 터지는데 언니는 그 일을 반복하면서도 바위 같이 표정의 변화가 없다.
언니는 평범한 여자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편지를 자주 썼다. 언니가 쓴 편지를 처음으로 훔쳐보았을 때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남편의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의 첫 장은 늘 성경 말씀을 옮겨 적는다. 그 다음은 좋은 마음을 가져달라는 내용과 남편의 부덕함을 용서해 달라는 내용이다. 평범한 여자인 내가 봤을 때는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내용이다.
언니 남편은 준수한 외모에 꽤 괜찮은 직장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큰 바다에서 펄떡거리는 고래를 생각했다. 언니는 친정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오빠 밑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심성이 말할 수 없이 고운 것이 탈이라면 탈이었다. 힘이 되어줄 부모가 없다고 얕잡아 본 것일까. 그는 언니를 수시로 업신여겨왔다.
나쁜 짓도 자주하다 보면 이력이 나는 것일까. 남자는 언니에게 못할 짓을 참 많이도 했다. 그의 주변에는 별 볼일 없는 여자들이 늘 와글거렸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징글징글한 따개비가 떠올랐다. 그가 권력과 경제력을 무기로 바람기를 부리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다지만 뒷일 까지 언니에게 떠맡기는 것은 나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자를 떼어 달라는 말도 습관이 되었는지 몇 개월 간격으로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하는 염치라고 없는 남자가 언니의 남편이다.
그는 집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집은 옷을 갈아입는 곳쯤으로 생각했다.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한 곳에 마음을 정착하지 못했고 만남 또한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래가 따개비를 업고 양지느러미를 벌리고 걸릴 것 없는 바다를 활개 치며 다닐 때도 언니는 묵묵한 바위처럼 그가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아 뿌리를 내릴 것이라며 믿고 신앙하였다.
언니는 편지를 전하기 위해 남편의 여자를 만난다. 만나서 큰소리 쳐도 시원찮을 판에 눈물까지 흘리며 좋지 않은 감정은 다 버리고 잘 살라는 말을 덧붙인다. 언니의 착한 마음에 감동하여 순순히 돌아서는 여자도 있었지만 오히려 욕을 하며 위자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여자는 몇 달을 애먹이며 떨어지지 않다가 결국 남자의 명예에 커다란 흠집을 내고 떠나갔다. 또 다른 여자는 남자 곁에 살게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남자는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평생을 바칠 생각을 한 여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형편이 이러한데도 오히려 그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확실히 처리했느냐고 당당하게 물어오며 왜 깔끔하게 처리를 못하냐는 핀잔까지 한다.
그런 말을 속으로 삼켜버리는 언니는 보통 여자들과 다르다. 언니가 살아온 환경이 그런 성격을 만들었을 것이다. 언니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 대신해 주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왔다. 남편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살갑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며 오히려 살살거리며 달라붙는 따개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일부 갖고 있었던 것이다.
화면 속의 귀신고래를 보면서 딱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평생 흔들리는 마음을 따라 이리저리 유영하며 한 세월을 보내고 늙어가는 것 같아 애처롭다. 고래에 붙은 따개비나 따개비를 붙이고 대양을 누비는 고래에게는 그들만의 편리공생이 존재하나 보다.
어쩌면 나 또한 유형무형 공생의 굴레를 쓰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험난한 세상에서 바위처럼 묵묵히 산다는 것도 어렵고, 고래처럼 권세를 손에 쥐고 화려한 척 살기도 어렵다. 누군들 따개비 같은 삶을 살고 싶겠냐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따개비가 되어 있기도 한다. 세상에는 힘과 부가 있는 사람이 있기에 약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이고 먹고 먹히기도 하고, 부리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는 사슬로 존재하는가 하면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구속이 자유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걸음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외로움이 있다. 마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에 몸은 정착할 곳을 잃고 온갖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마치 고래가 미친 듯이 하늘로 솟구쳤다 바다로 머리를 박는 것처럼.
고독은 권력이나 돈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무서운 병인가보다. 고래가 빈 바다를 두 쪽으로 가르고 몸부림치듯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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